유학생활을 마무리하며

유학을 떠나기 전 나는 심적으로 많이 지쳐있었고 조금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군 제대 이후 거의 쉬어본 적 없이 일만 하며 살아왔고, 어려서부터 한 번도 놓아본 적 없었던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어느덧 나의 상황들과 맞아떨어지며 지금이 떠나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땐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긴 휴가와도 같은 시간을 꿈꾸며 시작했기에 자칫 게을러질 수도 있었던 유학생활이었지만, 한국을 떠나기 몇 개월 전 스타트업 크로키에 합류하기로 한 결정이 나의 유학생활을 오히려 지금껏 가장 바쁘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바꿔 놓았던것 같다. 향후 한국 스타트업 커뮤니티에서 가장 주목받으리라 생각하는 CEO와 CTO, 그리고 뛰어난 개발자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탤런트 그룹에 속해 일할 수 있었던 경험은 그동안 내가 겪은 어떤 직장생활보다도 값진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 원격으로 일하면서도 커뮤니케이션 문제없이 좋은 프로덕트들을 개발하고 의미 있는 성과들을 얻을 수 있었던, 아마 한동안은 다시 겪어보기 어려울 이 소중한 경험은 나에겐 유학 경험이나 학위보다도 훨씬 더 큰 자산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제 짧았지만 한편으로는 길기도 했던 유학생활을 마무리하고, 처음으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외국인 디자이너로써 일을 시작하게 된 시점에서 내가 유학생활을 통해 겪은 경험들과 해온 생각들을 글로 정리해 놓으려 한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

서양 문화권에서는 일반적으로 대학을 가고 나면 가정으로부터 독립하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방을 따로 렌트하는 플랫 셰어의 개념은 보편적이다. 내가 시드니에서 거주했던 아파트도 플랫 셰어의 형태였는데, 이런 형태의 집은 이사가 잦기 때문에 지난 1년 반 동안 이곳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들의 국적은 일본, 인도, 이탈리아, 베트남, 호주, 영국, 독일, 터키 등 정말 다양했다. 같이 살았던 사람들뿐 아니라 학교 내에서도 다양한 나라에서 각기 다른 목적과 배경을 가지고 이곳에 온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그간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미디어를 통한 정보만을 접하며 겹겹이 쌓아놨던 한국 밖의 세상에 대한 수많은 편견들이 전부 해체되는 것을 느꼈다. 어떤 중국인들은 정말 스마트하고 젠틀했고, 어떤 독일인은 정말 무례하고 무능했고, 어떤 영국인은 심각할 정도로 내성적이었으며, 어떤 이탈리아인이 만들어준 스파게티는 지금껏 먹어본 스파게티 중 최악이었다. 결국 특정 사회 속에서 주입받은 개별 국가에 대한 이미지를 불특정 개인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반화였고, 특히나 중국 같은 경우 13억이 넘는 개개인을 통틀어 ‘중국인’의 이미지로 묶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우리가 한 사회에 오랫동안 속해서 접한 세상의 모습은 사실 실제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다. 각 나라에겐 다른 나라에 대한 각자의 시각과 입장이 있고, 그 안에서 미디어들은 또다시 나름의 입장과 주관을 토대로 정보를 선별하고 생산한다. 내가 그동안 알아온 세계인들은 실제 그들이 아닌 미디어가 만들어낸 그들의 이미지, 또는 짧은 여행들을 통해 접한 ‘여행자를 대하는 외국인’의 모습이었고, 그것을 가감 없이 신뢰해온 나에게 실제 사람들의 모습과 사고방식은 스스로 편견에 점칠되었던 나를 한없이 부끄럽도록 만들었다. 이토록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오가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선 사람들의 배경이나 인종이 아닌 사람 자체에 대해 가감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문화에 대한 이미지는 개인을 예측하기 위한 아주 작은 기초정보일 뿐, 그것 자체로는 그 누구도 판단해선 안되는 것이다.

권위에 저항하고 언론에 의심을 품도록 가르치는 교육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기 전 나는 시드니대학교 내 랭귀지 스쿨 과정을 이수했는데, 나의 예상과 달리 이 과정의 주 목적은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서양 문화권에서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호주 교육에 대한 이해도와 적응력을 높이기 위한 절차였고, 언어는 그저 그것을 위한 도구라는 느낌이 컸다. 매일 다양한 주제를 토대로 진행되었던 이 수업은 학생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장문의 글로 쓰거나 또는 서로 논쟁하도록 요구했고, 교수나 선생의 의견 역시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며 맹신하지 말 것을 강조했으며, 심지어 오늘자 신문에서 언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기사를 찾아 그 이유를 논하도록 하는 과제도 빈번히 있었다. 이들이 어려서부터 받는다는 이러한 Critical Thinking 교육은 한국에서는 위계와 예절교육에 밀려 언제나 뒷전이었고, 오히려 수업 중 선생님이나 교수님의 의견에 반박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며, 권위와 언론을 의심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사회에서 살아온 나에게 이 수업은 기본적인 사고방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이러한 토론 수업들의 목적은 논리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아닌, 누구나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토론할 수 있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대부분의 교수들 역시 격식이 필요한 문서 등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이메일이나 수업 중에는 학생들이 자신을 Professor 등의 타이틀 없이 First name 만으로 호칭하도록 할 정도로 학생과 교수의 관계에 격이 없었고, 이러한 평등한 분위기는 어느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 있게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어느 곳에서는 무지한 긍정론과 권위적 교육이 말 잘 듣는 일꾼들을 생산해내는 동안 선진국들은 성역 없는 비판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재들을 끊임없이 배출해내고 있었다.

예술이 존중받는 도시

시드니 대학교는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와 호주 총리들을 배출한 훌륭한 학교이지만, 디자인 학과는 분명히 이 학교의 주력 분야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호주에서 디자인 유학을 한다고 할 때 RMIT가 아닌 시드니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경우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무엇보다 시드니에 살면서 많이 느꼈던 것은 아트와 디자인에 대한 기본적인 사람들의 관심과 투자를 대략 비교해볼 때 아트 7 : 디자인 3 정도인 것 같았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아티스트는 수입에 관계없이 분명 디자이너보다 존중받는 직업이고, 특히나 디지털 디자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정말로 기대 이하였다. 시드니 대학교 예술학부가 있는 SCA 캠퍼스에서도 대다수의 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과는 공예, 회화 등의 순수 미술, 혹은 실험 영화 등의 현대 예술이었고, 내가 공부한 디지털 디자인은 취업률은 비교적 높겠지만 가장 인기 없는 학과 중 하나였다. 모두가 대학을 취업을 위한 스펙으로 보고, 점수에 맞춰 학과를 선택하거나 취업이 잘 되는 학과를 선호하는 한국에서 살아온 나에게 이곳 학생들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상당히 낯설었다. 어쩌면 사회가 탄탄한 안전망을 갖췄을 때에만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돈보다 우선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시드니 대학교 SCA를 졸업한 유명 디자이너 Marc Newson의 작품들이 실용성과 미니멀리즘을 최우선시하는 유럽 디자이너들과는 조금 다른, 어떻게 보면 산업디자인 보다 오히려 조형미술에 가까운 성격을 지닌 것도 예술을 사랑하고 아티스트를 존중하는 시드니의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시드니보다 아름다운 시드니 대학교 캠퍼스

만약 누군가 시드니에서 한 곳만 방문해야 한다면 나는 오페라 하우스보다 오히려 시드니대학교 캠퍼스를 추천하고 싶다. 오페라 하우스는 사실 멀리서 보거나 혹은 이미지를 통해 볼 때가 더 아름답고, 심지어 내부는 조금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반면 시드니 대학교 캠퍼스에는 한 장의 사진에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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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 리스트 등에 자주 오를 정도로 시드니대학교 캠퍼스는 이미 유명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언제나 Camperdown에 있는 메인 캠퍼스만 논해진다는 점이었다. 메인 캠퍼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Rozelle에 예술 학부만을 위해 따로 설립된 Sydney College of the Arts (SCA) 캠퍼스는 내가 전공과목 수업을 듣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인데, 시드니를 떠나며 가장 그리울 것 같은 곳이기도 하다. 메인 캠퍼스의 웅장하고 화려한 느낌과 달리 SCA 캠퍼스에는 마치 과거로 돌아온듯한 아름다움과 아주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평온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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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SCA 캠퍼스의 이런 분위기는 상당히 이례적인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곳은 과거 19세기에 정신병원으로 사용되었던 부지를 이후 시드니대학교에서 매입해 모든 건물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내부만 새롭게 바꿔 아트 캠퍼스로 바꾼 형태라고 한다. 재밌는 것은 이들이 누군가는 불쾌해할 수도 있는 이런 이야기를 감추기는커녕 오히려 입학 첫날 해준다는 점이다. 심지어 학교 건물 내에는 과거 정신병원 시절 사용되었던 심리실험 공간 등을 학생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보존해둔 곳도 있다. 시드니 내에 이런 어마어마한 부지를 매입하고도 이런 오래되고 낮은 건물들을 온전히 유지하며 관리하는 것을 보면 이들이 분명 효율성이나 수익성보다도 기존의 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덕에 나는 이토록 아름답고 고요한 캠퍼스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학기가 끝난 후에도 SCA 도서관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매일 집에 돌아오며 석양이 커다란 나무들을 반쯤 비춘 모습에 감탄해 매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지만 그 느낌을 담을 수 없어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도 시드니를 방문할 일이 생기면 꼭 다시 찾아가보고 싶은 곳이 Rozelle에 위치한 SCA 캠퍼스다.

샌프란시스코 에버노트 액셀러레이터

어렸을 적 한번 가본 것인 전부였던 미국을 시드니 유학 중 두 번이나 방문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학업과 병행으로 스타트업 크로키 팀에 속해 함께 제작했던 모바일 사전 비스킷(당시 쿠키단어장)이 2012년 에버노트가 한국에서 개최했던 대회에서 수상하며 에버노트 본사 방문과 10일간의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지원받았고, 이후 2013 에버노트 데브컵에서 또다시 수상을 하며 곧이어 한 달 동안 진행되었던 에버노트 액셀러레이터에 6팀 중 한 팀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액셀러레이터 기간이 나의 첫 학기 마지막과 2주 정도 겹치는 바람에 일정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지만, 모든 수업의 교수님들께 상황을 설명하고 떠나기 전까지 모든 프로젝트와 과제를 마무리한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아 간신히 참여할 수 있었다.

액셀러레이터 기간 동안 참가팀들은 에버노트에서 제공한 호텔에 머물며 매일 에버노트 본사로 출근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세미나 등에 참여했고, 개발 중인 프로덕트를 Sequia 캐피털, NTT Docomo 등에 직접 피치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져 그들로부터 조언을 얻거나 또는 직접적 도움을 얻기도 했다. 우리 팀은 에버노트에서 준비한 다양한 스케줄을 소화함과 동시에 비스킷의 아이패드 버전, 크롬 익스텐션 초기 버전, 예문 기능 테스트, 그리고 스마트워치 Pebble 용 노티피케이션 기능까지 개발하는 등 프로덕트 측면에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에버노트 역시도 시작은 작은 스타트업이었기에 그들은 스타트업이 초기에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가끔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관대한 지원에 한 달 내내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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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세미나, 이벤트 등으로 정신없이 바빴지만, 무엇보다 이 기간 동안 얻은 가장 소중한 자산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대만, 홍콩, 독일, 캐나다, 콜롬비아에서 온 참가팀 멤버들은 물론이고, 에버노트에서 일하고 있는 정말 좋은 사람들과도 한 달 동안 함께 생활하며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이들과는 지금도 서로 연락하며 안부를 묻거나 도움을 주고받기도 하는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수도 캔버라

에버노트 액셀러레이터를 마치고 돌아와 다음 학기 전까지 남은 기간 동안 나는 캔버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캔버라는 시드니와 멜버른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위치한 호주의 수도인데, 1901년 호주가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라이벌 도시인 시드니와 멜버른이 서로 수도가 되기 위해 대치한 채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 상황이 8년간 이어지자 결국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 수도를 새로 건설하기로 합의하면서 탄생한 도시라고 한다. 사실 캔버라는 여행지로써는 시드니나 멜버른, 퍼스 등에 비해 선호 받지 못하고 있는 도시다. 대부분 시드니에서 캔버라로 여행을 가는 경우는 관광 패키지를 이용해 당일로 다녀오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크게 볼만한 것이 없다고 알려져 있는데, 나는 인터넷에서만 보았던 캔버라의 깨끗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충분히 느껴보고 싶었고, 개인적으로 짧은 여행을 통해 명소만 방문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캔버라 여행 역시 비교적 여유 있게 시간을 잡고 즐기기로 했다.

호주의 가장 큰 할리데이인 크리스마스 연휴와 새해를 잇는 긴 휴가 기간 중 방문한 캔버라는 그야말로 어느 날 사람들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은 고요한 도시였다. 나는 아주 가끔 길에 나타나는 버스를 타거나 주로 걸어서 캔버라 곳곳을 여행했는데, Bush Capital이라는 별명답게 캔버라에는 정말로 나무와 숲이 많았고, 방사형으로 설계된 계획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에 연일 감탄해 손에서 카메라를 놓을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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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캔버라 신문을 통해 알게 된 ‘크리스마스 라이트 세계신기록’을 보유한 한 가정집에 찾아갔었는데, 이 평범한 가정은 SIDS(영아급사 증후군)으로 아이를 잃은 후, 이 질병을 방지하기 위한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30만 개가 넘는 전구를 사용해 집 전체를 장식한다고 한다. 아이를 잃은 커다란 슬픔을 극복하고 심지어 그것을 이러한 아름다운 이벤트로 이어나가는 그들의 삶의 모습은 감명 깊었고,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된 후에는 그 수많은 전구 장식 하나하나가 의미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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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도시를 여행하던 마찬가지겠지만, 캔버라에 방문해서 신 국회의사당과 전쟁기념관 등 명소만 봐서는 캔버라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Telopea Park의 드넓은 잔디 위에 수놓아진 높은 나무들 사이를 걸어보며 도시 속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하기도 하고, 구 국회의사당 뒤편에 위치한 하우스 가든에서 단란히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들의 모습들을 통해 이들이 어떻게 삶을 즐기고 있는지 엿보기도 하고, 한편으론 Aboriginal Tent Embassy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며 침략의 역사 속에 희생당한 이 땅의 원래 주인들의 깊은 슬픔을 헤아려볼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캔버라 여행은 시드니나 멜버른으로 떠나는 관광 이상의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Parallax Magritte와 Wikiprice

돌아보면 나의 인터페이스 디자인 커리어는 말 그대로 Mobile First였다. UI 디자이너로서의 첫 직장이었던 블링크팩토리는 브랜드앱 전문 제작회사였고, 이후 합류한 스타트업 크로키에서도 모든 프로젝트의 중심은 웹이 아닌 모바일 앱이었기 때문에 웹 프로젝트를 진행할만한 기회가 자주 있진 않았다. 앱이 웹을 위협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UI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해 다양한 앱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지만 나는 아직도 앱보다는 웹의 신봉자이고, 테크놀로지의 미래는 폐쇄된 앱이 아닌 오픈된 웹이 여전히 쥐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유학기간은 내가 웹 개발을 심도 있게 공부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진행해 볼 수 있었던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첫 학기에 제작했던 Parallax Magritte는 인포그래픽 과제를 하던 중 발견한 Parallax.js라는 자바스크립트 기반 엔진을 이용해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마우스 커서 또는 모바일 디바이스들의 자이로스콥 센서에 반응해 움직이도록 구성한 작품이다. 예술과 기술을 잘 접목해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었다는 좋은 평가를 얻었고 나 스스로도 즐겁게 진행했던 프로젝트였지만, 에버노트 액셀러레이터 참가로 인해 서둘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면서 마그리트의 작품 중 4개만으로 구성한 부분에 아쉬움이 남는다.

Wikiprice는 내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들 중 하나를 토대로 제작한 웹사이트인데, 빅맥 인덱스, 스타벅스 인덱스, 아이폰 인덱스 등 동일 제품의 국가별 가격차이를 비교하고 그것을 환율에 대조해 장기적 환율 변동을 예측하거나 상품 가치가 과도/과소평가된 제품들을 판단하기 위해 제작되는 Currency Comparison Tool을 특정 기관 또는 기업의 제작에 의존하지 않고 위키피디아처럼 크라우드소싱으로 전환해서 별도의 비용 지출 없이 인덱스를 제작하고, 업데이트의 주기 또한 훨씬 더 줄일 수 있는 Crowdsourcing Currency Comparison Tool을 만들어보기 위한 시도로써 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기술적으로 집중했던 부분은 Flexbox, SVG 등 내가 익숙하지 않았던 방식들을 최대한 활용해 웹사이트를 디자인하는 것과, MySQL, PHP를 이용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그것을 그래프와 연동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A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B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써 A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프로젝트 기반의 수업 들을 통해 스스로 새로운 무엇인가를 배워가는 과정은 단순히 새로운 지식이나 스킬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